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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풍경 --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

포카라 2022. 1. 1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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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삶은 되풀이 할 수 없는 한 번의 여행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 꽃 피고 낙엽지는 시간의 반복이 백번을 넘기도 전에 우리가 왔던 미지의 세계로 귀환하여야 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에는 빛의 속도로 18억 광년이라는 시간을 달려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에 닿는 것도 있다. 이 광막한 우주의 시간에 비추어 보면 인간이 지상에서 보내는 생물학적 시간의 길이란 얼마나 왜소한 것이랴.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한 삶을 신회적 의례를 통해 영원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 육신의 죽음 뒤에도 내세에 이어지기를 희망하는 상징적 의례들은 인간의 모듬살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은 죽음 저 너머에 까지 이어진다. 아, 욕망의 덧없음!앙겔로플로스 감독은 <안개속의 풍경>에서 열 두살 소녀 블라와 다섯살 동생 알렉산더를 지상의 여행객으로 화면에 내려 놓는다. 그들이 찾아가는 독일에 있다는 아빠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끝에 있을지도 모르는 “삶의 의미”의 메타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에게 다가오는 세상은 가혹하다. 어린이의 시선은 때묻지 않았음으로 세상의 모순에 더 깊은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어른이라는 동물들,,, (그들도 언젠가 어린이였던 , 이제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은 두 아이를 열차에서 끌어내고, 블라를 강간하고, 매춘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더 참혹하게도 이 순진 무구한 아이들을 겨냥해 총질을 서슴지 않는다.

 

이 보다 더 슬픈 것은 어른들의 어린이에 대한 무관심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철저히 어린이들의 세계와 격리되어있다. 무관심은 ‘소통의 부재’라는 현대인의 비극적 일상에 다름 아니다. 어른들은 추운 겨울날 밖에서 죽어가는 말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더불어 슬퍼한다는 자비의 감정은 사라지고 그들만의 축제에 온 정신이 쏠려 있다. 눈 오는날, 어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만 도취되어 아이들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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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돌처럼 굳은 채 눈 오는 거리에 서 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의 심장에 가 닿지 못한다. 낙엽처럼 지상을 여행하는 아이들에게 어른이라는 존재는 무자비하게 휘몰아치는 미친 바람처럼 불어온다. 사정없이 휩쓸리고 내동댕이쳐지면서 두 남매는 자신들의 삶을 찾아간다. 오갈데 없이 바람 부는 대로 정처없이 떠 다니는 <낙엽들>에게 유랑극단의 청년 오레스테스의 선의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승만도 못한 트럭운전사에게 폭행당한 블라는 오레스테스에게 연정을 느끼며 상처를 치유하려 하지만 그가 동성연애자임을 알고 절망한다. 다가온 사랑 앞에 몸부림치는 블라. 오레스테스를 떠나는 블라에게 첫사랑의 아픔은 시로 다가선다.  


“이렇게 헤어질 순 없어외로운 작은 소녀야.첫사랑은 다 그런 거란다.심장은 부서질 듯 두근거리고다리는 후들거리고,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인가? 운명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고통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고통 속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라.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고통마저 내가 껴안아야 할 운명의 반쪽임을 자각해야 한다. 운명에 대한 사랑. 블라는 첫사랑의 품에 안겨 흐느끼면서 거역하기 힘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막막하게 뻗은 길위로 몰려온 어둠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쏟는 가로등 불빛이 애처로운 밤. 블라는 자신 앞에 나 있는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걸어간다. 인간은 누구나 블라처럼 외롭다. 운명애를 연구하는 조셉 켐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아모르 파티 Amor fati 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우리 삶이 지니는 이러한 측면에 대해 아니라고 한마디만 할 수 있으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하는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린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두 아이가 국경의 강을 건너 안개속에 서 있는 나무가 있는 벌판으로 달려간다. 어둠에 휩싸인 강의 저쪽은 죽음의 세계이며, 고통과 절망, 의사 소통이 부재한 공간이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곧 이러한 세계와 결별을 의미한다. 여기에 앙겔로플로스 감독의 따스한 시선이 자리한다. 국경 수비대가 쏜 두 발의 총성도 희망의 피안에 도착하려는 아이들의 선한 의지를 꺾지 못한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 알렉산더의 윤곽이 나를 절망속에 빠뜨렸다가 블라가 일어나는 모습에서 한껏 위로 받는다. 이들은 벌판에 서 있는 나무를 향해 손 잡고 달려나간다. 나무는 대지와 하늘의 소통을 매개하는 상징이다. 여성적인 것 (대지)과 남성적인 것 (하늘) 의 교감이 나무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무는 성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나무가 서 있는 공간은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삶에서 상처받고 지친 아이들은 나무 그늘 아래서 희망의 재생을 꿈꾼다.아이들이 찾아가는 ‘삶의 목적’은 없는지도 모른다. 삶의 종착역에서 우리가 주울 수 있는 것은 시간의 껍데기일 뿐. 인생은 길이다. 길 위의 존재. 인간은 걸어가야 할 길위에 있는 과정적 존재다. 이 영화는 인생이라는 것을 도달할 수 없는 과정으로서 바라본다. 안개 낀 도로는 곧 불투명함이 본질인 인생을 은유하는 것이리라. 영화의 주인공이 ‘풍경’이라는 세간의 평처럼 아이들이 정처 없이 나아가는 슬픔의 여로가 빛바랜 사진첩처럼 내 가슴에 인화된다. 장면 하나 하나가 루브르에 결려 있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인상파적이다.

 

블라의 슬픔이 영상으로 떠오르면 내 가슴에 고통의 잔물결이 인다. 풍경사진의 대가 지오르고스 아르바니티스가 카메라를 들었다.허지만 이 영화를 풍경화로만 보면 반쪽만 보는 셈이다. 풍경은 그저 풍경일 뿐이다. 거기에 인간의 삶이 이입됨으로써 영화는 시작되며 그 풍경이 삶과 얼마만큼 동화되느냐에 따라 오브제로서 풍경은 작품으로 펄펄 살아난다. 이 영화를 위해 선택된 풍경은 너무 슬프다. 영화음악의 귀재 엘레니 카레인드로우가 시종 풍경의 동반자가 되어 풍경이 담아내는 가슴 저리는 장면들을 불에 덴 것처럼 각인시킨다. 눈 감고 음악만 들어도 좋을 매혹의 선율이 아무 이유도 없이 울적함이 찾아드는 가을을 적시고 지나간다. 두 아이가 덧없고 정처없는 지상에서 안식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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