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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나비 -- 불꽃처럼 타오르다 스러지는 삶.

포카라 2022. 1. 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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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나까야마 미호' 보다 더 내 가슴을 뒤흔든 남자가 있다. '기타노 다케시'다. 무표정한 얼굴과 침묵, 그리고 스스럼없는 살인.

 

나는 <하나비>를 통해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연기 앞에서 옴쭉 달싹 하지 못했다. 나는 거미줄에 걸려 바둥거리는 하루살이 신세가 되었다. 사지가 마비되고 죽음 같은 공포에 소름이 돋았다.

 

 

<러브 레터>가 사랑의 회상에 관한 영화라면 <하나비>는 사랑의 표현에 관한 영화라고 나는 보고 싶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사랑' 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상대방에게 드러내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사랑에 대한 생각도 달리 표현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주목하자. <하나비>는 어쩌면 죽음에 대한 성찰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니시 (기타노 다케시)라는 경찰의 케릭터가 그렇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어린 딸을 잃고 아내는 말기암 환자인 강력계 형사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절친한 동료 호리베가 야쿠자 총에 맞아 반신불수가 된다. 야쿠자를 쫒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하마저 죽는다. 열을 잔뜩 받은 니시는 야쿠자를 찾아내 피의 응징을 하고 옷을 벗는다. 여기서 그의 비극이 끝나도록 할만큼 삶은 관대하지 않다.

 

반신불수가 된 동료의 가난한 아내도 맘에 걸리고, 자신의 아내 병원비도 만만치 않다. 야쿠자를 제발로 찾아가 돈을 빌리게 되고, 돈을 갚지 못하자 야쿠자들은 그를 협박한다. 급기야 형사로 분장하고 은행을 털어서 주변사람들에게 돈을 보낸 뒤 아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남의 불행에 대해 쉽게 이야기한다. 그건 내 불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리는 그처럼 비인간적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 말한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철학이 윤리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인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를 강영안 교수는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힘없는 타인의 호소를 인정할 때 나의 자유, 나의 자기 실현을 그대로 무한정 추구할 수 없다. 얼굴의 현현을 통해 나의 자발성에 제동이 걸린다. 타인의 곤궁과 무력함에 부딪힐 때 나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만일 내가 타인의 불행에 눈을 감아버린다면 나는 죄인인 셈이다.

 

타자의 윤리와 사적 폭력

 

만일 당신이 불행을 겹겹이 짊어진 니시 형사라면 이 너저분한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신의 불행에 눈 감는 사회에 대해 니시는 정면 대응한다. 폭력적인 야쿠자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한다. 가난을 구제해 주지 못하는 사회에 대해 그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돈을 빼앗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자신이 사회에 저지른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 된다.

 

여기서 그의 영화를 <폭력의 미학>으로 규정하는 입장이 대두된다. 악에는 악으로, 총에는 총으로! 그의 영화 속에는 선혈이 낭자하다. 야쿠자 양아치 새끼들을 탄창에 총알이 바닥나도록 갈겨버리는 니시 형사. 야쿠자 새끼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 왜? 그들은 강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약자 입장인 니시 형사가 총으로 그들을 갈겨버려 마빡에 총알이 정면으로 뚫고 들어갈 때, 그 잔인한 살인의 장면은 우리의 몸을 와들와들 떨게 만든다. 젊잖은 이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말한다, "폭력을 사적인 물리적 폭력으로 정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위선적 사회에 가래침을 뱉는, 소설가 박민규의 말투를 빌리자면 "조까라 마이싱" 이다.

 

 

삶은 불꽃처럼 타오르다 스러진다

 

기타노 다케시의 폭력은 소름이 끼치게 잔인하면서도 어느 한 구석에서 후련한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분명 살인은 잘못이기 때문에 우리는 폭력에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폭력의 부당함 앞에서 우리는 <타인>의 절망적인 얼굴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죄인이라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받아들여 실천하지 못할 지라도 심정적 이해에 도달한 때문에 폭력적 대응에 마음 한 구석이 반응하는 것은 아닐까?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속 열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다. 그는 모든 사회적 폭력 앞에서 묵묵 부답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는 것 같다. 그는 오로지 침묵으로서만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야쿠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가서 갑자기 권총을 꺼내들고 하복부에 총알을 쑤셔 넣는다. 총알을 박아 넣은 후에도 그의 표정은 무표정하긴 마찬가지다. 서늘한 잔인함이랄까? 그의 얼굴에서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슬쩍 스친다. 체념과 달관이 어우러져 복합적인 표정은 다케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트레이드 마크다.

 

은행을 털고 아내와 여행을 떠나는 바닷가에까지 야쿠자들은 돈 냄새를 맡고 쫓아온다. 그의 살인을 알고 있는 후배 형사들도 그를 찾아온다. 바닷가는 막다른 골목이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사내는 아내와 불꽃놀이를 한다. 먼 발치에 죽음이 와 있는 것을 아는 무표정한 이 사내는 아내를 위해 멋진 불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이내 불발탄이 된다.

 

'하나비[花火]'는 죽음을 향해 가는 주인공 니시와 주변인물들의 비극적인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로서 읽을 수 있다. '하나[花]'는 삶과 사랑을 상징하는 반면, '비[火]'는 폭력과 죽음을 상징한다. 불꽃은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진다. 그러나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처럼 가깝다. 아내는 말없이 사랑을 보여준 남편에게 말을 건낸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바닷가에는 끝없이 파도가 밀려들고 부부가 바라보는 바닷가를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잡아내는 사이 두 발의 총성이 울리고 막이 올라간다. 영화가 끝나지만 파도 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인간의 삶에 자연이 불인(不仁)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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