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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피해피 브레드 -- 꼼빠뇽, 빵을 나누는 사이.

포카라 2022. 1. 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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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혹은 동료

 

식구라는 말은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란 뜻이죠? 가족의 다른 말입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가족이 아닌데도 밥을 같이 먹을 수 있죠. 가족 만큼 소중한 사이 입니다. 생각해보면 같이 밥 먹는다는 것이 아주 심오한 뜻이 있네요.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밥 먹으면 체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밥을 같이 먹는 사이.

 

카페 마니의 남자 미즈시마가 꼼파뇽의 의미를 묻습니다. 빵을 나눠먹는 사이라네요. 동료를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미즈시마는 죽음을 앞둔 노 부부가 자살을 위해 카페 마니를 찾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늙은 부부는 젊은 날 추억의 장소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하지요. 미즈시마는 이들 부부에게 정성을 다해 빵을 만들어 내놓지요. 그리고 해답을 찾습니다.

 

가족은, 부부는 어떤 관계여야 바람직할까요? 사랑이라는 밧줄로 묶인 관계가 좋을까요? 물론 가족 간에 사랑은 필수겠지요. 그러나 사랑이 구속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가족이 정말 소중하지만 한편으로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는 가족 구성원 간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동료 관계는 어떨까요? 서로 빵(밥)을 나눌 수 있는 친밀한 사이. 이런 관계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이 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옆에 있는 동료에게 구속적 행동을 하면 동료 관계는 깨집니다. 어쩌면 가족보다 동료 관계가 서로에게 덜 상처주는 사이일 수도 있겠네요. 가족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도 끈을 잘라버리지 못합니다.

 

해서 가족과 동료관계의 장점만 모아보면 어떨까요? 사랑하되 구속하지 않는 동반적 관계. 참으로 이상적이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홋가이도 츠기우라 도야코 호숫가에 카페를 하는 리에와 미즈시마 부부 관계가 꼼빠뇽이었습니다.

 

달과 마니

 

영화에서 부부는 항상 빵을 두 쪽으로 나눠 먹습니다. 서로가 가족이기 이전에 동료라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서로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것보다 배려해주는 관계. 사랑이라는 말도 그렇다네요. 한문으로 사랑'애' 잖아요. 애껴주는 관계가 사랑이랍니다. 애껴준다는 것과 일방적 사랑의 강요는 전혀 다릅니다. 애껴준다는 말 속에는 상처까지도, 허물조차도 보듬어준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 속 여주인공 리에는 도희지 생활에 심신이 지칩니다. 리에는 결혼을 하고 홋가이도로 옵니다. 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겸한 카페를 열고 남편과 함께 빵을 만들고 커피를 내립니다. 그런데 리에야 말로 힐링이 필요한 사람이죠. 도회지 생활이 심신을 피곤하게 했는데 츠기무라에서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거든요.

 

 

 

 

저는 영화 속 첫 장면에 나오는 동화를 주목합니다.

 

<달과 마니>라는 동화를 리에는 좋아합니다. 마니는 달을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달을 자전거에 태우고 멀리 멀리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달은 태양 때문에 마르고 쇠약해집니다. 태양이 나타나면 달은 숨어야 합니다. 마니는 달에게 말합니다. 태양으로 인해 달은 빛을 받아서 캄캄한 밤에 사람들을 비춰주는 소중한 존재라고. 달은 태양으로 부터 받은 사랑을 다시 다른 존재와 함께 나누는 역할이죠. 배려와 사랑의 관계가 아닐까요? 빛(사랑)을 받아서 또 다른 누군가를 비춘다는 것! 사랑은 흐름이겠네요.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도 있죠.

 

그렇지만 도시 생활에서 리에는 마니를 찾지 못하고 지쳐만 갑니다. 그 때 미즈시마가 리에 앞에 나타나고 둘은 도야코 호숫가에 옵니다. 미즈시마는 자신이 리에에게 마니가 될 결심을 합니다. 멀찍이서 리에를 지켜 봅니다. 리에는 과연 마니를 찾을까요?

 

스에히사는 소학교에 다닙니다. 엄마는 아빠와 불화로 스에히사를 떠나갔습니다. 아빠는 딸에게 밥을 해주지 못하고 식탁에 메모와 함께 돈을 놓고 갑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호박죽이 그리워 스에히사는 혼자서 웁니다. 카페에서 그 아이를 데려다 빵과 차를 줍니다. 엄마가 만들어준 맛과 다르다며 먹지 않습니다. 리에는 카페에 두 부녀을 초대합니다. 딸은 울고 있는 아빠의 목을 두르고 같이 울면서 말합니다, 아빠와 함께 울고 싶었어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그 아이 때문에 저 역시 코 끝이 시큰해졌습니다. 두 부녀는 같이 식사를 하면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갑니다.

 

'꼼빠뇽’(compagnon, 영어로는 companion). 동료 내지는 벗이라는 뜻이지만, 어원은 ‘빵(pan)을 함께하는(com)’ 사람에서 왔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숙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오키나와로 여름 휴가를 갈 생각이었으나 남친한테 채이고 혼자서 츠기우라로 옵니다. 거기서 철도원으로 일하는 남자를 만납니다. 도시 숙녀는 더 많은 돈, 더 많은 행복을 갖고 싶다고 말합니다. 남자는 배우지 못하고 지방에서 태어나 도시 생활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도시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둘의 고민은 서로 다른 듯 하지만 같습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이 두 남녀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둘은 도쿄로 갑니다. 이들 앞에 어떤 삶이 기다릴까요?

 

 

 

 

<카모메 식당>이나 <음식남녀> 등에서 소재를 음식에서 찾습니다.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해주는 행위는 어쩜 거룩한 행위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먹지 못하는 죽기 때문에 무엇인가 먹여주는 행위는 그야말로 숭고한 겁니다. 먹임을 통한 상처의 치유. 먹는 것은 또한 나누는 행위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같이 먹을 수 있겠어요. 영화는 극적 반전도 없고 다소 밋밋하고 잔잔할 뿐입니다. 등장인물들도 자신들이 어디서 상처 받았는지 크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상처받았다는 사실 뿐입니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나까야마 미호가 눈 내리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젖히고 있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해패해피>도 <러브레터>도 모두 배경이 눈 내리는 홋카이도 입니다. 일본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여행지가 바로 홋카이도 랍니다.

 

상처의 치유는 공감에서 시작

 

상처는 어떻게 치유 되나요?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일차적인 해결책일지도 모르죠. 허나 이 영화에서는 우회적입니다. 그냥 정성을 다해서 빵과 커피를 내놓을 뿐 입니다. 당신의 아픔이 뭔지 구구절절 캐묻지 않습니다. 아코디언을 들고 다니는 연장자는 가끔 카페에 들러 멀뚱하게 호숫가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십니다. 그러나 귀는 열려 있습니다. 그저 듣습니다. 옆에 있으면서 상처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그 상처는 치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 같군요.

 

요즘 힐링이 대세라더군요. 아픈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극악무도한 신자유주의가 발톱을 세우고 있는데 상처가 안 날리 있겠어요. 영화는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당장 아픈 사람들에게 일차적인 봉합을 말하는 것 같네요. 그 실밥이 언제 터질지 모르죠. 그런데 거대 담론이 말하는 것처럼 모순의 궁극적 해결을 통한 치유는 쉽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계속 거짓말을 합니다.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고 착취당하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허우적거립니다. 말이 구조적 해결이 최선이라고 하지만 그 길은 참으로 멀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 아픈 사람들은 어쩌라구요. 저는 이 영화에서 위로 받았습니다. 꽃피는 봄과 벼 이삭이 익는 가을, 눈이 푹푹 내리는 겨울 풍경 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제각각이듯 고민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니 마술 방망이는 없습니다. 주변을 조금씩 배려하고 나누는 삶 말고 뭐가 더 있겠어요.

 

 

영화를 보고 난 뒤에 홋카이도에 가보고 싶더군요. 참 아름다운 풍경들이네요. 여러분에게도 추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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